다시 시작하는 아가서
아가서는 오랫동안 내게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원어를 살펴보고, 인칭을 따라가고, 주어를 추적해 왔다.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
어디에서 말하는 이의 목소리가 바뀌는가.
계속해서 본문을 살펴보았다. 그런데도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에게서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가장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이대로 아가서는 끝내 이해하기 어려운 책으로 남게 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초막절이 끝나고 아침 라이브 모임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창세기 3장, 목요일에는 레위기, 금요일에는 다니엘서.
그리고 라이브 모임이 끝난 뒤 함께 성경을 읽는 시간에는 지금 마태복음을 읽고 있다.
마태복음 22장에 이르렀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태복음 22장 37절(일본어 성경 신개역 2017을 바탕으로 번역)
마태복음은 왕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책이면서도, 읽는 사람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묻는 듯하다.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돈인가.
사회적 지위인가.
너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너의 마음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율법 전문가도, 부자 청년도, 제자들까지도 자기 마음의 왕좌에 무엇이 앉아 있는지를 드러내 보이게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너의 마음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초림의 사건을 통해 읽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듯하다.
지난 2년 정도, 나는 성경을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사람이 응답하는 기록으로 바라보며 말씀 앞에 서 왔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익혀 왔던 신학적 개념의 틀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내 안에 굳어져 있던 생각들도 하나씩 내려놓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말씀 앞에 조용히 서 있는 것.
그렇게 지내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그때그때 깨닫게 되는 일상이다.
아가서를 블로그의 주제로 삼은 뒤로는 매일 아침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야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사랑을 말씀하신다.
사람은 그 사랑에 응답한다.
아가서는 어쩌면 그 응답의 기록일지도 모른다고.
이제야 비로소 아가서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추적해 온 인칭도, 주어도 버릴 필요는 없다.
누가 말하고 있는가.
누가 응답하고 있는가.
그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자, 다시 시작이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고민스럽기만 했던 아가서의 숲을 다시 걸어 보자.
가장 먼저 말을 시작하는 이는 누구인가.
마지막으로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 목소리는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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